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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고려 말기의 혼란과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혁명적 사건이었다. 고려 왕조는 50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려 왔지만, 말기에 들어 중앙과 지방을 장악한 권문세족의 횡포, 외세에 대한 의존과 내부의 부패가 심화되면서 결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다. 또한 정치적 불안정과 불필요한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심화되었고, 민심은 이탈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정치적 질서와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그 중심에는 고려의 무장이자 훗날 조선의 초대 왕이 된 태조 이성계가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이라는 파격적 방법을 통해 고려 왕조를 종식시키고 조선을 창건하였다. 그는 고려 말기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이라는 결정적인 사건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의 지지를 바탕으로 고려 왕조의 쇠퇴에 맞서 개혁을 주도하였다. 이성계는 과전법 도입을 비롯한 전제 개혁을 실시하여 권문세족의 사적 권력을 약화시키고, 농민들에게도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이를 통해 이성계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치세와 행적은 조선왕조실록 중 첫 번째 실록인 태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태조실록은 그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고려의 장수로서 활동했던 시기부터 왕위에 올라 조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한 역사적 문서이다. 태조실록은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즉위 이전의 역사적 배경과 치세 6년 동안의 주요 사건들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다. 이 실록은 조선의 건국과 그 의의를 분석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의 정치와 사회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러나 태조실록에는 고려 왕조와 권문세족의 부패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기록하거나, 태조의 업적을 강조하고, 그의 무예나 공적을 과장되게 묘사한 부분도 많다. 특히, 태종의 집권기 중에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실록이 태종의 정치적 목적과 맞물려 있어 그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태종은 자신의 정통성과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 이성계의 건국 과정을 부각하였고, 고려 왕조의 부패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런 점에서 태조실록은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역사 기록으로서 조선의 정통성과 태종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 글은 태조 이성계의 건국 과정과 그 의미를 살펴본 후, 태조실록에 담긴 주요 내용을 검토하고, 그 역사적 가치와 동시에 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조선 1대왕 태조
1. 태조 이성계와 조선 건국의 배경 이성계의 조선 건국은 고려 말기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불안정한 사회 질서를 배경으로 한다. 고려 말기 권문세족과 왕실의 부패, 정치적 불안은 신진 세력과 민중에게 불만을 초래하였고, 이성계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 그의 명나라 지지와 친명파 신진사대부와의 연합은 조선 건국의 첫걸음이 되었다.
2. 위화도 회군과 정권 장악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고려의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최영이 주도한 요동 정벌이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이유로 사불가론을 주장하며 회군을 결단했고, 이로써 그는 명확히 신흥 세력의 대표자로 부상했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패망을 재촉하는 계기이자 새로운 왕조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3. 권문세족의 특권 축소와 전제 개혁 이성계는 권력을 잡은 후 전제 개혁을 추진하며 권문세족의 특권을 약화시켰다. 과전법을 통해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차지한 사전과 수조권을 회수하고, 국가가 소유하는 공전을 늘렸다. 이러한 개혁은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에게는 권력을 강화하고,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안정과 부를 재분배하는 효과를 주어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4. 태조 이성계의 즉위와 새로운 왕조의 기틀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하고 1392년 조선의 초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그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새로운 도읍을 정하여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농본주의와 숭유억불의 정책을 통해 조선을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왕조로 발전시키려는 기틀을 마련했다.
5.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확보와 태조실록 편찬 태조실록은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태조의 공적을 기록함으로써 조선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실록은 태조의 고려 말기 장수 시절부터 조선 건국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을 상세히 담고 있으며, 1413년 최종 완성되었다. 이 실록은 조선 초기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지만, 태종 집권 시기에 편찬되어 그의 입맛에 맞게 일부 왜곡되었다는 논란이 있다.
6. 태조실록에 나타난 과장과 편향성 태조실록에는 고려 말의 혼란을 과장하거나 태조의 전공을 부각하여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높이는 서술이 많다. 예를 들어 위화도 회군 시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는 묘사, 태조의 전투력이 과도하게 찬양된 부분, 최영이 무리하게 추진한 요동 정벌에 대한 부정적 기술 등은 당시 정치적 목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왕자의 난과 태종의 효심이 강조되며 태종 집권의 정당성이 뒷받침되었다.
7. 태종의 집권과 태조실록의 정치적 목적 태종은 집권 후 태조실록 편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태조의 과오를 부각하고 자신의 공적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실록의 내용을 조정하였다. 특히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수적 열세에도 경복궁을 장악하고 권력을 잡았다는 내용, 정도전과 신덕왕후의 악녀화를 통한 자신의 정당화 등은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부분으로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8. 태조실록의 사료적 가치와 한계 태조실록은 조선 건국 초기의 사회, 정치, 경제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지만,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곡필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한계도 존재한다. 태조실록에 기록된 태조와 그의 조상들의 무협지적 묘사는 과장된 측면이 크고, 태종의 집권을 위한 논리와 정당화가 부각되는 부분은 이후 실록의 객관성과 차별점을 가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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